돌아보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2009/09/04 10:15 by 헤니히

어쩐지 요즘따라 모처의 모님이 보고싶다는 기분이 들더라니. 요즘 매우 기운없어 하시더군요. 덥썩 부둥부둥. 사실 저는 요즘 매우 행복한 관계로, 이곳 저곳에 말을 걸기가 미안할 정도랍니다. 특히 고통스러워 하시는 분들에게는 제가 어떠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조심스러워지고, 때로는 위로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이유는, 그런 제 이야기라도 모님처럼 고통에 빠진 분들에게 일말의 위안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용기를 낸 까닭입니다.


서로가 모두 다 다른 개성과 기분과 느낌을 가질진대, 누구의 고통이 누구보다 더 큰지 작은지 어찌 잴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도 한때 고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통의 기간이 길어서 저는 그게 잘못된 상태인지도 몰랐고, 어떻게 치유해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세상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줄 알았으며, 누구나 저와 같은 줄 알았습니다. 불안, 두통, 우울, 체증, 가슴의 통증, 사람에 대한 두려움, 자기혐오 등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치고 애를 쓰던 어느날, '어떻게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느껴지는 무력감과 피로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짧지만 온 생의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바로 어떻게 해도 자기자신이 바뀌지 않을 때 느끼는 절망적인 피로감인 것입니다. 그럴 때, 눈을 감으면 영원히 잠들어버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듭니다. 이래선 안돼지, 힘을 내야지 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힘이 나지 않습니다. 평생 고통이 절 따라다닐 것 같았어요.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슬픔과 고통을 즐기는 것으로 타협하게됩니다. 고통은 아무리해도 없어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 밖에. 어떻게든 살아야하니까요. 


사실 이런 종류의 고통은 눈에 보이는 명확한 이유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말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고통과 그 원인과 문제에 대해서 끈질기게 집착해왔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같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서로 이끕니다. 친구들과 지인들의 고통에 대해 듣고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와 어떤 것이 다른가, 어떤 것이 같은가, 질문을 하기도 하고 대답을 듣기도 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면 상대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져서 괴로울 때도 있고, 상대의 고통을 해소해주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어떤 뚜렷한 도움을 줄 수도 없고 뚜렷한 방향제시마저 할 수가 없습니다. 타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 자신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또 그의 이야기를 듣는가? 무슨 이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그것이 바로 소통의 오묘함입니다. 소통이란 것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고통의 근원을 찾는 작업인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 어떤것인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의식을 하지 못할 수 있으나, 모두가 그렇습니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고통과 그 원인에 대해서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존중하게되며 그 과정에서 상대방도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대화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게 되었다면, 이미 치유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뒤로 돌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제 경우의 문제는, 타인들이 느끼듯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었습니다. 물론 사회가 가르친 방법으로, 기쁠 때의 행동과 슬프거나 위로할 때의 행동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위에서 어떤 감정반응이 일어나면 그에 맞춰 배운대로 행했습니다. 한때는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는 줄 알았고, 겉으로 연기하는 그것이 진짜 감정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과 저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로인해 자신은 특별했고 동시에 매우 고독했습니다. 자기비하는 열등감에서 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우월감이 없어지면 자기비하도 없어집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무에서 입자와 반입자가 쌍생성하듯 함께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그때문에 타인보다 강한 줄 알았습니다. 주위의 아이들은 조금만 억울해도 울었으며, 유치하게도 조그만 것에도 웃었습니다. 우월감을 느꼈지요. 그런데 나에게 없는 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 나는 결핍된 존재이다 라고 느꼈을 때는 그들에게 심한 열등감을 느끼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강함은, 우월감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딘 것은 무지한 것일 뿐 강한 것이 아닙니다.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무너져 버리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저런 잔병치레를 하지 않으면 후에 감기만 걸려도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통각을 느끼지 못하면 불도 칼도 무서워지지 않는 법이지만, 진짜로 불에 태워지거나 칼에 베이면 죽음에 이릅니다. 자기보호를 위해 통각이 있는 것처럼 정신적인 고통도 그와 같습니다. 쓸모없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강함은 고통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요. 전에 제가 유일하게 남긴 슈내 팬픽 '대화'편에서 카스티엘의 입을 빌어 말씀드렸듯이, "한번도 실패하지 않고 안전한 길을 걷기 보다는 이것저것 겪어보고 엉뚱한 선택을 하고 유혹에 빠지고 후회하고 좌절한 다음 가장 가치있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실된 것일세. 자신이 보고 싶은 한쪽 면만을 보지 않고 그 이면까지 알아보고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진실로 참된 사랑일세." 이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진실로 고통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강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님, 그리고 고통받는 당신들은 진정한 강함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 강함을 얻게 되었을 때, 그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것을 제가 감히 장담한다면 믿겠습니까?


물론 저는 내 친구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떠들어 봐야 고통의 반의 반만큼도 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고통을 지지하며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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